[나의 이야기]

소나무 아래서

구슬玉에 제비燕이라는 玉燕은 제비처럼 날씬하게 도로에 따라 집들이 이어졌다.
이상하게도 마을의 非包裝 도로에는 가로수가 한그루도 없었고 가을바람에 흙먼지라도 날리면 메마른 서부의 황야처럼
荒凉하기만 했다.
해성이와 용무당숙하고 서로 이야기하길 西部의 텍샤스같다고 말 한적히 생각난다.
옥연은 황산면의 西部邊方에 있으니 서부의 황야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마을에서 푸른 숲이라곤 학교와 낮으막한 동산 이곳밖에 없다.
그래서 마을밖 아주 멀리서도 우리들은 뒷동산의 키큰 소나무들을 볼 수가 있다.
동산에는 소나무외 다른 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적어도 백년이상 됨직한 수령에 이삼십 메타정도 되는 소나무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보아온 소나무의 그 모습은 현재도 전혀 변하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다.
토양은 사질토에 척박하여 대부분 잔모래와 돌멩이가 보인다.
아름드리 소나무는 손으로 헤아릴 정도이면 대부분 나무들은 키에 비해서 가늘게 자랐다.
그나마 황토 흙은 주조장의 野積場으로부터 동내창고 언저리까지 볼 수가 있고 그 위쪽으로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다.
동산의 주인은 누구인줄 모르겠고 마을사람 누구도 자기 소유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酒造場
옛적 할머니들 말씀에 의하면 黃山面 玉燕里는 실낱같은 오솔길이 나 있는 솔밭이었다고 한다.
이곳 지형은 낮은 山稜線으로서 옛날에는 좌우에는 바다와 연해 있었다.
옥연이란 마을 이름은 옥동리의 옥과 마을 중앙이 제비집을 닮았다고 하여 제비연을 합쳐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日帝시대에 日本人들이 소나무를 베어 내고 一字形의 도로를 개설하여 新興都市의 town를 건설했다. 서너 채의 일본식 집은 木造 양철집이고

초가인 韓屋이 사이사이 지어졌는데 大槪 道路邊에 짓고 後園을 뒤로하는 樣式을 취했다.
玉埋山에 鑛山을 開發하고 산 밑 언저리에는 일본인들이 집단村을 이루고 살았었다. 또 그들은 거리마다 벚나무를 심었고
학교 土臺뒤 小路에도 감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干拓 事業한 넓은 들판에는 crover 씨앗을 뿌렸다고 한다.
봄이 되면 길가마다 흰 벚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려 옥매산에 이르도록 雲霧의 터널을 만들어 일대 壯觀을 이루었다.
解放이 되던 해에, 無智한 동내 사람들은 일본인이 했던 것은 무조건 排斥하여 벚나무를 한 그루 남기지 않고 베어버렸으니
아-- 哀惜한 일이다.